시조/연원

“ 영천최씨의 시조/연원”




1. 최씨의 연원(淵源)

汎崔氏通史得姓史實錄에 依하면, 崔氏新羅六姓之一也
按東史崔氏出於通仙部通仙部在府二十五里許葛谷村龍水巖下洞口有址礎石羅列至今完然如昔世傳崔氏之先花山君所居之地我國之有崔氏自此始也
新羅前斯盧國의 部族聯盟体로써 徐羅伐의 여섯 部落의 氏族集團을 六部村이라 한다.

▶범최씨통사특성사실록에 의하면 최씨는 신라 육성 중 하나이다. 동사를 보면 최씨는 통선부에서 나왔다. 통선부는 경주부 25리 허갈곡촌 용수암 아래 동네어귀에 초석이 있어, 지금까지 완연하고 최씨의 선조 화산군이 살았던 곳이며 최씨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신라 전 사로국의 부족연맹체로 서라벌의 여섯 부락의 씨족집단을 육부촌이라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에 따르면 고조선(古朝鮮)의 유민(流民)이 자리잡은 육촌(六村)과 촌장(村長)은

첫째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이며 촌장은 알평(謁平)
둘째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이며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
셋째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이며 촌장은 구례마(俱禮馬)
넷째 자산(觜山)의 진지촌(珍支村)이며 촌장은 지백호(智伯虎)
다섯째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이며 촌장은 지타(祗沱)
여섯째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이며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신라(新羅) 3대(代) 유리왕(儒理王) 9년[서기32]에 육촌(六村)을 육부(六部)로 개편하고 개국좌명(開國佐命)의 공(功)으로

1. 양산촌(楊山村)을 급량부(及梁部)라 하고 이씨(李氏) 성(姓)을
2. 고허촌(高墟村)을 사량부(沙梁部)라 하고 최씨(崔氏) 성(姓)을
3. 대수촌(大樹村)을 점량부(漸梁部)라 하고 손씨(孫氏) 성(姓)을
4. 진지촌(珍支村)을 본피부(本彼部)라 하고 정씨(鄭氏) 성(姓)을
5. 가리촌(加利村)을 한기부(漢岐部)라 하고 배씨(裵氏) 성(姓)을
6. 고야촌(高耶村)을 습비부(習比部)라 하고 설씨(薛氏) 성(姓)을


사성(賜姓)하였다. 통선부(通仙部)는 사량부(沙梁部)의 고려개명(高麗改名)이라 최씨(崔氏)의 시조(始祖)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진한(辰韓)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도리(蘇伐都利)다. 그후 후계(後繼)가 불분명하였으나 신라 경문왕(景文王) 14년[서기874년] 최치원(崔致遠)이 당(唐)에서 과거(科擧)에 급제한 후 최씨가 현출(顯出)되었다. 치원(致遠)은 헌안왕(憲安王) 1년[서기857]에 출생하였으며 시조 소벌도리공(蘇伐都利公)의 24世이다. 字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며 최승우(崔承祐), 최언휘(崔彦撝)와 신라 천재(天才) 삼최(三崔) 중 한 분이다. 신라가 망하며 승우(承祐)는 견훤(甄萱)에게 언휘(彦撝)는 왕건(王建)에게 귀속하고 치원(致遠)은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둔세(遯世)하였다.

최씨(崔氏)의 상계도(上系圖)는 아래와 같다.
①蘇伐都利—②大伐利—③小伐利—④大平—⑤昊彬—⑥桄允—⑦庴—⑧屖—⑨悾—⑩局—⑪茂—⑫怀—⑬玠—⑭敞—⑮殷義—⑯瑞鳳—⑰惠陽—⑱太壬—⑲東雄—⑳亨公—㉑林芬—㉒桂陽聖—㉓山允—㉔致遠/捿遠


2. 영천최씨의 유래와 분파

영천최씨는 고려중엽 의종(毅宗)과 명종조(明宗朝)에 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으로 국가에 유공(有功)하여 영천(永川)을 관(貫)으로 받은 휘(諱) 한(漢)을 시조(始祖)로 삼아온 성씨(姓氏)이다. 시조공 휘(諱) 한(漢)께서는 신라 육부촌장(六部村長) 사량부(沙梁部) 대인(代人)의 후예(後裔)로서 뛰어난 재덕(才德)으로 금호강(琴湖江) 상류 이수삼산(二水三山)에 터잡아 백리(百里)의 땅에 덕업(德業)을 베풀어 그 공덕(功德)으로 자손들이 이곳에서 800여 년을 면면히 살아왔다.

시조공의 묘는 군위현(軍威縣) 서편(西便) 30리(里) 되는 송현묘좌(松峴卯坐)라고 하나 수차의 병란(兵亂)으로 사적(事蹟)과 묘소(墓所)가 실전(失傳)되어 알 길이 없다.【(대구 지산동 영모정 사적 비문 참조(大邱池山洞永慕亭事蹟碑文參照)】

선고(先考) 식(寔)의 四子가 모두 부원군(府院君)으로 봉군(封君)되어 장자(長子) 행(洐)은 월성(月城), 三子 호(湖)는 곡강(曲江), 四子 익(瀷)은 호산(好山)으로 나뉘어졌다.
영천최씨는 고려시대 대문벌(大門閥)로 시조공으로 부터 10代를 대를 이어 15~6名의 정승(政丞) 판서(判書) 등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잠영세족(簪纓世族)이다.
시조공은 연산부원군(燃山府院君)

2世 완(玩)은 문과장원(文科壯元) 상찰사(上察使) 판도판서(版圖判書)이며, 집(깳)은 좌의정(左議政)이다.

3世 상의(尙義)는 진사(進士)이고상례(尙禮)는 절도사(節度使)이다.
4世 승주(承澍)는 전호위상호군(典護衛上護軍)
5世 윤기(允琪)는 판도판서(版圖判書)
6世 륜(倫)은 사온영동정(司醖令同正)이며 안인(安仁), 안제(安悌), 유진(有珍), 유중(有重)의 四子를 두셨고, 안인(安仁)의 二子 용화(龍和)는 가선대부도총부도총제(嘉善大夫都摠府都摠制)로 총제공파(摠制公派), 三子 홍범(弘範)은 통덕랑(通德郞)으로 그의 子 하영(河永)으로 판서공파(判書公派), 안제(安悌)는 군수공파(郡守公派), 유진(有珍)은 정헌대부판전의사사(正憲大夫判典醫寺事)로 정헌공파(正憲公派), 유중(有重)은 목사공파(牧使公派)
6世 소(佋)의 5세손인 長子 계성(繼性)은 부사공파(府使公派)次子 계손(繼孫)은 사정공파(司正公派)
6世 원(遠)은 진사공파(進士公派)로 분파되었다.
2世 집(깳)의 5세손인 長子 광준(光俊)은 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으로 찬성공파(贊成公派), 次子 무선(茂宣)은 숭록대부의정부우정승 영성부원군(崇祿大夫議政府右政丞 永城府院君)으로 영성군파(永城君派)의 파조(派祖)로 나뉘었다.



※참고 흥해최씨(곡강)대동보[興海崔氏(曲江)大同譜]에 호(湖):麗朝毅明間 文科 以佐理勳功 三重大匡門下侍中 三韓壁上功臣神虎衛上將軍 曲江府院君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 영천최씨 시조공의 상계고찰(上系考察)

영천최씨 시조(始祖) 이전의 상계(上系)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분파계대(分派系代)를 상고(詳考)할 수 없고 다만 시조공 연산군(燃山君) 휘(諱) 한(漢)이 고려 의종(毅宗)과 명종(明宗) 양조(兩朝)에 벼슬하며 공(功)을 세우고 연산부원군(燃山府院君:연산은 지금의 영천)에 봉해졌다고 족보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의종(毅宗)은 고려 18대 왕으로 서기 1146년에서 1170년까지 24년간 재위하였으며 명종(明宗)은 19대 왕으로 서기 1171년에서 1197년까지 27년을 재위하여 양대(兩代)는 51年이다.
의종(毅宗)과 명종(明宗)시대에는 큰 정변(政變)이 여러 번 있었으나 시조공의 훈공(勳功)과 시대배경을 살펴보면,

첫째, 정중부(鄭仲夫)의 난(亂)
정중부는 고려의 무신(武臣)이며 정치가이다. 서기 1106년에 출생하고 1179년에 졸(卒)하였다. 1146년 김부식(金富軾)의 아들 김돈중(金敦中)에게 수모를 당하고 김돈중을 매질하였다. 이에 김부식이 정중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당시에는 문관(文官)이 무관(武官)을 멸시하던 때였으며 의종(毅宗) 4년[1170년] 문신(文臣)들의 오랜 횡포와 멸시에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 등이 정변(政變)을 일으켜 의종(毅宗)을 폐위시키고 김돈중을 비롯한 문신(文臣) 100여 명을 죽였으며 명종(明宗)을 왕(王)으로 삼았다. 명종(明宗)은 위 세 사람에게 벽상공신(壁上功臣)을 봉(封)하였다.
이로써 무신정치(武臣政治) 100년의 계기가 되었다.
무신정쟁(武臣政爭)은 1179년 청년장군(靑年將軍)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鄭仲夫)와 그의 사위 송유인(宋有仁) 아들 균(筠) 등을 제거하고 9년간의 정씨집권(鄭氏執權)을 막았으나 이의민(李義旼)의 13년, 최씨(崔氏) 60년의 무신통치(武臣統治)가 이루어졌다.

둘째, 조위총(趙位寵)의 난(亂)
명종 4년(1174)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등의 무신정치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켜 3년간 이어졌다. 서기 1174년 전주최씨사도공파(全州崔氏司徒公派) 시조가 된 균(均)이 예부랑중(禮部郞中)으로 동북로지휘사(東北路指揮使)를 맡아 조위총(趙位寵)의 난(亂)을 평정하여 가던 중 조위총의 부장(副將) 김박승(金朴升)에게 잡혀 병마사(兵馬使) 이의(李儀)와 병마부사(兵馬副使)인 균(均)이 사로잡혀 절사(節死)하고 원수(元帥) 윤인첨(尹鱗瞻)에 의하여 평정되었다.
살펴보건대 시조공이 공(功)을 세우고 연산군(燃山君)으로 봉해진 것이 이 시대(時代)이다.
오늘날 영천최씨의 시조공 휘(諱) 한(漢)의 상계(上系)의 분적세계(分籍世系)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신유보(辛酉譜) 서문에 영천최씨(永川崔氏)는 진한(辰韓) 사량부(沙梁部) 대인(大人) 소벌도리공(蘇伐都利公)의 후예(後裔)이다.
둘째, 영천최씨(永川崔氏)는 전주최씨사도공파(全州崔氏司徒公派)에서 분적(分籍)되었다.
셋째, 최치원(崔致遠)의 제(弟) 서원(棲遠)에서 분적(分籍)되었다.
넷째, 치원(致遠)의 5세손인 휘(諱) 선지(善之), 8세손 애(藹)의 후손인 휘(諱) 식(寔)의 四子 중 次子가 연산군(燃山君)이다.
곧 영천최씨는 전주(全州)와 경주(慶州) 중 어디에서 분파(分派)되었는가가 이론이 분분하다.




4. 영천최씨 문중별(門中別) 분관이론(分貫異論)

전장에서 주장되고 있는 여러 가지 설에 대하여 영천최씨 각 문중은 어떤 의견이 있는지 살펴본다.

첫째, 총제공파(摠制公派)
○-前略- 惟吾崔氏出自通仙部爲羅代著姓 高麗初 禮部郎中令 諱 均節死西域 以功封完山 完山卽全州也 赫代繁衍珪組世襲而至于十世孫諱寔有四子皆爲封君而一子諱漢封于永川 永川之有崔氏自此始矣 -後略-【庚午後三十八年丁未(1907) 翰基謹序】
-전략- 우리 최씨는 통선부에서 나온 신라의 저성(著姓)이다. 고려초 예부랑중령 휘 균(均)이 서역에서 절사(節死)하여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다. 지금의 전주(全州)다. 누대에 걸쳐 10대손 휘 식(寔)의 四子가 모두 봉군되었는데 그 중 1人인 휘 한(漢)이 영천에 봉군되었다. 영천최씨가 여기서 시작되었다. -후략- 【경오후 38년정미(1907) 한기 근서】

둘째, 정헌공파(正憲公派)
○-前略- 吾有之自燃山君以上貫全州則尙矣 -後略-【乙酉譜序文(1825) 18世柱元】
-전략- 우리의 관은 연산군 위부터 전주다. -후략- 【을유보(1825)서문 18세 주원】

○永川崔氏始祖本全州諱均高麗明宗時封完山府院君 子甫淳贈文正 子允儞 子毗-子誠之-子文度-子思儉-子乙義-子寔-四子 洐, 漢, 湖, 瀷 二子漢封燃山君以永川貫焉 【永川崔氏始祖分派小說:丙戌 17孫 琦一 謹序】
영천최씨 시조의 본은 전주다. 고려 명종때 완산부원군인 휘 식, 자 보순, 자 윤이, 자 비, 자 성지, 자 문도, 자 사검, 자 을의, 자 식의 四子 행, 한, 호 익에서 二子 한이 연산군에 봉해져 영천을 관으로 삼았다. 【영천최씨 시조분파 소설:병술년 17세손 기일 근서】

셋째, 군수공파 원당문중(郡守公派 元堂門中)
○-前略- 公姓崔氏諱文炳字日章號省齋其先全州人後從貫永川高麗燃山君諱漢後代 -後略-【省齋先生崔公之墓上之二十四年(1740)庚申資憲大夫工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摠管李家煥謹撰】
-전략- 공의 성은 최씨, 휘는 문병, 자는 일장, 호는 성재이다. 선대는 전주이며 고려 연산군 휘 한 후대는 영천을 관으로 삼았다. -후략- 【성재선생묘갈, 자헌대부 공조판서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이가환 근찬】

○-前略- 崔氏之先出自新羅卽六部之一也謹按文憲備考則羅代有崔致遠以文章著世麗顯宗時追拜門下侍郞平章封文昌侯卽前朝四賢之一也至五世孫諱善之以耆耈平文宗官至都署史八世孫諱藹官至版圖判書至後孫諱寔以功官至少尹判禮府事封其四子爲君燃山君諱漢卽四封君之一也後以燃山改名永川吾族之貫永川自此始族 -後略-【丁未譜跋文(1825) 22世撥】
-전략- 최씨는 신라 육부의 일이다. 문헌비고를 살펴보면 신라의 최치원이 문장을 떨쳐 고려 현종때 문하시랑평장으로 모시고 문창후에 봉하였다. 전 왕조의 4현인 중 1인이다. 5세손 휘 선지가 문종 때 도염서사로 8세손 휘 예가 판도판서, 휘 식이 소윤판례부사, 그의 네 아들이 모두 봉군되고 휘 한이 연산군에 봉해졌으며 연산은 영천으로 개명되었고 영천최씨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후략- 【정미보발문(1825) 22세 발】











넷째, 군수공파 율리문중(郡守公派 栗里門中)

【1956년 군수공파 율리파보(栗里派譜) 24世 종한(宗瀚)】













다섯째, 사정공파 담양진사문중(司正公派 潭陽進士門中)
○-전략- 世傳崔氏先花山君所居之地也謹按 ~ 以下郡守公派元堂門中二十二世撥之跋文과同一 【潭陽進士公派 24世 永明 謹序】
-전략- 화산군이 살던 곳에서 누전되고 삼가 살펴보면 이하는 22세 발의 발문과 동일하다. 【담양진사공파 24세 영명 근서】

여섯째, 전주최씨상고사(全州崔氏上古史)에는 곡강최씨(曲江崔氏)를 완산백 최언휘(完山伯崔彦撝)의 후손이라고 주장(主張)하고 있다.
그 외 판서공파(判書公派)와 부사공파(府使公派)와 찬성공파(贊成公派)와 영성군파(永城君派)에는 이견(異見)이 없으며 목사공파(牧使公派)와 진사공파(進士公派)의 파보(派譜)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5. 영천최씨 고려인물(高麗人物)

○최무선(崔茂宣)

太祖實錄 卷七 太祖四年己亥四月甲子
“檢校叅贊門下府事 崔茂宣卒 -後略-”
태조실록 권7 태조4년 기해 4월 갑자
검교참찬문하부사 최무선 졸 –후략-

최무선(崔茂宣)은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12년[서기1325]에 영양(永陽:지금의 영천(永川)) 금오마단마을에서 광흥창사(廣興倉使) 동순(東洵)의 차자(次子)로 태어났다. 평생을 왜구(倭寇)에 대처하기 위하여 화약(火藥)과 화포(火砲) 발명에 몸 바쳤다.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하고 화약과 화포로 진포대첩(鎭浦大捷)을 거두었다. 그 공(功)으로 순성익찬공신(純誠翊贊功臣) 광정대부문하부사(匡靖大夫門下府事) 삼중대광(三重大匡) 영성군(永城君)에 봉(封)하였다.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격변기(激變期)에 신흥세력(新興勢力)에 의한 화통도감(火㷁都監)이 해체(解體)되고 실의(失意)하여 저술(著述)에 몰두하다가 태조(太祖) 4년[서기1375]에 졸(卒)하였다.
태종 원년(元年)[서기1401] 이조(李朝)는 공(公)에게 숭록대부의정부우정승(崇祿大夫議政府右政丞)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을 추증(追贈)하였다. 공(公)은 영천최씨(永川崔氏) 시조공(始祖公) 휘(諱) 한(漢)의 7세손이다.

○최원도(崔元道)

호(號)는 천곡(泉谷)이며 정헌대부판전의사사(正憲大夫判典醫寺事) 유진(有珍)의 장자(長子)이다. 생몰은 미상(未詳)이나 목은(牧隱) 문하(門下)에서 광주이씨(廣州李氏) 둔촌(遁村) 이집(李集)과 동문(同門) 수학(修學)하였고 과거(科擧)에 급제(及第) 동년(同年)한 도의교(道義交)를 맺었다. 여말(麗末) 공민왕(恭愍王:서기1351-1374년 재위)때 사간(司諫)이었으나 신돈(辛旽)의 폭정(暴政)에 화(禍)를 염려하여 낙향하여 영천(永川) 나현(羅峴)에 은거(隱居)하였다. 수년 후 둔촌(遁村) 이집(李集)도 신돈을 비방하다가 아버지 당(唐)을 모시고 영천 천곡(泉谷)에 도피(逃避)하여 4년을 공(公)의 집에서 숨어 난을 피하게 해주었다.
공(公)은 영천최씨 시조공 휘(諱) 한(漢)의 8세손이며 천곡(泉谷)과 둔촌(遁村)의 아름다운 도의교(道義交)의 이야기는 천곡과 둔촌의 우정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천곡(泉谷)과 도의교(道義交)를 나눈 둔촌(遁村)을 알아본다.

○이집(李集)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14년[서기1327년]에 광주이씨(廣州李氏) 중시조(中始祖) 당(唐)의 二子로 태어났으며 초명(初名)은 원령(元齡)이고 字는 호연(浩然) 호(號)는 둔촌(遁村)이다. 충목왕(忠穆王) 3년(1347) 급제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 17년(1368) 신돈의 화(禍)를 피하여 아버지 당(唐)을 모시고 동년(同年) 영천(永川) 최사간(崔司諫)에 의탁했다. 다음해(1369) 당(唐)이 천곡(泉谷)의 집에서 죽으므로 천곡의 묘터에 장사(葬事)하였다. 공민왕 20년(1321) 신돈이 죽고 이집(李集)은 판전교사사(判典校寺事)를 제수(除授)받았으나 곧 사임하고 낙향하여 우왕(禑王) 13년(1387)에 졸(卒)하였다.
천곡(泉谷) 최원도(崔元道)와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도의교(道義交)는 전술(前述)한 바와 같다.


6. 전주최씨족보(全州崔氏族譜)와 관계자료 고찰

첫째, 경주최씨상계세보(慶州崔氏上系世譜) 【쇼와(昭和) 12년, 서기1937년 刊】 전주최씨(全州崔氏)는 경주최씨(慶州崔氏) 시조공(始祖公) 최치원(崔致遠)의 7세손이 균(均)이고 15세손이 을의(乙義)이고 그의 아들 선(宣), 굉(宏), 우(宇), 녕(寧)의 4형제로 기록되어 있다. 도식화하면 그림과 같다.

따라서 을의(乙義)의 자식에 식(寔)이 없다.

둘째, 전주최씨문간공파보(全州崔氏文簡公派譜, 1981)에는 균(均)의 9세손이 을의(乙義)이고 10세손에 선(宣), 굉(宏), 우(宇), 녕(寧)의 四子만이 나타나 있다.

셋째, 전주최씨분파전도(全州崔氏分派全圖)에 위와 같이 균(均) 後 10세손이 위와 같다.

넷째, 전주최씨 군수공(맹온)파 초계대가파보(全州崔氏 郡守公(孟溫)派 草溪大家派譜)에 영천최씨 시조 휘(諱) 한(漢)의 선부군(先父君)인 휘(諱) 식(寔)이 균(均)의 10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섯째, 고운선생역사발췌집(孤雲先生歷史拔萃集)에 최씨상계보(崔氏上系譜) 보유편(補遺篇)의 계통도(系統圖)를 보면 전주(全州)와 영천(永川)의 분파(分派)가 잘 나타나 있다.

여섯째, 최씨 득성 각 분관 상계약도(崔氏得姓各分貫上系略圖)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대략적인 족보(族譜)에는 영천최씨(永川崔氏) 선부군(先父君) 휘(諱) 식(寔)과 시조공(始祖公) 휘(諱) 한(漢)의 기록이 없고 다만 초계대가파보(草溪大家派譜)에 기록된 내용만으로 영천최씨총제공파(永川崔氏摠制公派)와 정헌공파(正憲公派) 파보(派譜)의 기록과 일치한다고 봄은 다음과 같이 불합리함이 드러난다. 전주최씨상고사(全州崔氏上古史)에는 총제공파(摠制公派)의 기록으로 영천최씨는 전주(全州)에서 분관(分貫)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초계대가보(草溪大家譜)에 을의(乙義)의 5형제 중 차자(次子)인 식(寔) 출생년이 명(明)나라 홍무(洪武) 경신(庚申)이라고 되어 있다. 명(明)은 중국(中國)이며 홍무(洪武)는 명(明) 태조(太祖)의 연호이다. 명 태조는 서기 1368년에 개국(開國)하였으며 태조의 재위는 31년간(1368~1398)이다. 홍무(洪武) 경신(庚申)은 서기 1380년이다. 서기 1380년은 앞에서 검토한 영천최씨(永川崔氏) 시조공(始祖公)의 7세손인 무선(茂宣)이 죽은 후 5년이다.
또 식(寔)의 5형제로 기록된 것도 전주최씨(全州崔氏)의 타기록의 4형제와 다르다.
또한 사간공(司諫公) 원도(元道)와 광주이씨(廣州李氏) 이집(李集)과 동시대(同時代)이며 고려 공민왕(恭愍王)과 우왕(禑王)때이다. 영천최씨 시조공의 득관(得貫)은 서기 1150년경이므로 전주최씨사도공파(全州崔氏司徒公派) 시조인 균(均)은 동시대[*앞의 조위총(趙位寵)의 난(亂) 참고] 인물임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영천최씨는 전주최씨사도공파(全州崔氏司徒公派)와 관계가 전혀 없다고 본다.


7. 기타 후손설(後孫說)

○최치원(崔棲遠)의 후손설(後孫說)

영천최씨군수공파율리문중(永川崔氏郡守公派栗里門中)과 경주최씨(慶州崔氏) 상계보(上系譜) 보유편(補遺篇)에 의하면 영천최씨(永川崔氏) 시조공(始祖公) 휘(諱) 한(漢)은 신라문창후(新羅文昌侯)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동생인 서원(棲遠)의 후손이다. 24世인 서원(棲遠) ― 25世 주(宙) ― 26世 사청(思淸) ― 27世 식(寔) ― 28世 연(衍, 月城君), 한(漢, 燃山君), 호(湖, 曲江君), 익(瀷, 好山君)로 최씨득성분관도에 나타나 있다.
최치원(崔致遠)의 출생년은 서기 857년, 동생이면 860년쯤으로 추정된다.
휘 한(漢)이 공(功)을 세우고 득관(得貫)한 것이 서기 1170년경이므로 한(漢)의 출생은 아마 1130년경이 될 것이다.
1130년과 860년은 대략 270년의 차이가 있다.
30년을 한 세대로 기준한다면 9代에 이른다.
따라서 서원(棲遠)에서 시조공까지는 4代에 그치므로 서원(棲遠)의 후손설(後孫說)은 그 연도 차이가 약 150년이 되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 경주최씨 문창후 후손설(慶州崔氏 文昌侯 後孫說)

영천최씨 군수공파 원당문중파보(郡守公派元堂門中派譜)와 담양진사공파 파보서문(潭陽進士公派派譜序文)에 따르면[*앞의 파별이설(派別異說) 참조] 영천최씨는 치원(致遠)의 5세손인 선지(善之) 8세손인 애(藹)의 후손이라고 한다.
5世 선지(善之)는 도염서사(都染署史) 8世 애(藹)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위 경주최씨화숙공파(慶州崔氏和淑公派) 세계표(世系表)를 보면 애(藹)의 4세손에 식(寔)이 나타난다.
식(寔)은 치원(致遠)의 12세손이다. 앞과 같이 한 세대를 30년으로 보면 11代 330년이다. 치원이 857년생이므로 1187년이 된다. 1187년은 고려 명종(明宗) 17년이다. 대략 명종(明宗)과 신종(神宗) 연간이다. 영천최씨 시조공의 출생이 1130년경이므로 약 50년의 차이가 난다. 800-900년 전 일이므로 50년은 큰 의미가 없다. 식(寔)의 아들이 승안(承安)과 사안(思安)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타기록의 4형제와 다른 점이다.
식(寔)의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된 바를 고증할 수 없고 여러 가지 추정설이 있으나 확인된 바가 없다. 따라서 영천최씨는 경주최씨화숙공(慶州崔氏和淑公)에서 분적(分糴)되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다만 군수공파(郡守公派)와 담양진사공파(潭陽進士公派) 파보(派譜)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앞으로 계속 깊이 고찰(考察)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은
첫째, 경주최씨(慶州崔氏), 전주최씨(全州崔氏), 영천최씨(永川崔氏)는 득성조(得姓祖) 소벌도리공(蘇伐都利公)의 후예(後裔)이다.
둘째, 시조공(始祖公) 휘(諱) 한(漢)은 고려 의종(毅宗)․명종조(明宗朝) 인물이 확인된다.
셋째, 영천최씨는 전주최씨(全州崔氏)와 무관(無關)하다.
넷째, 영천최씨는 치원(致遠)의 동생 서원(棲遠)의 후손(後孫)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다섯째, 영천최씨는 경주최씨화숙공(慶州崔氏和淑公)의 후손(後孫)이란 주장이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깊은 고찰이 요망된다.
여섯째, 전주최씨상고사(全州崔氏上古史)에서 언급한 곡강최씨(曲江崔氏)와 같이 완산백(完山伯) 최언휘(崔彦撝)의 전주(全州) 후손의 가능성도 깊은 고찰이 요망된다.


2022년 11월 일
군수공파율리문중(郡守公派栗里門中) 26세손 진태(辰胎) 근지(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