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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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월곡(月谷) 최흥효(崔興孝)
기본 정보
本貫 世系 : 영천최씨 10세. 부사공·사정공파 上系.
출생 : 1370년(공민왕 19)경. 사망 : 1452년(문종 2) 이후
출생지 : 성주
정의
조선전기 예문관 직제학, 첨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한 문신. 서예가.
개설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백원(百源), 호는 월곡(月谷)으로 초명은 효흥(孝興)이었으
나 흥효(興孝)로 개명하였다. 부친은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를 지낸 일(壹), 조부는
좌윤(左尹) 흡(洽), 증조부는 시중 영(英), 증조모는 성주이씨 이백년의 따님이고, 본생
(本生) 조부는 천곡 원도(元道)이다. 모친은 김해 송씨이며 판서를 지낸 이숭문(李崇
文)의 딸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고, 인녕부윤(仁寧府尹)을 지낸 여흥 민씨 민겸
(閔謙)의 딸을 후처로 맞아들였다. 장자 계성(繼性)은 부사공, 차자 계손(繼孫)은 사정
공파 종중(宗中)을 열었고 따님은 동래인 동평군 정종(鄭種. 무관 출신 당상관)에게
출가하였다.
1411년(태종 11) 문과 급제하여 예문관 직제학을 지냈고, 관직에 있을 당시에는 국
가의 대외문서와 각종 필사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고려 말 ∼ 조선 초기 초서로 일가를 이룬 서예가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최흥효는 1370년경 성주에서 출생하여 1452년 이후 작고한 것으로 추정되나 생몰
년에 대한 기록은 없고 실록 등 관련 기록을 통해 대략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묘소는 실전되어 찾을 수 없고, 모친 김해송씨와 차자 휘 계손(繼孫)의 묘소가 성주
선남면과 수륜면 선산에 보존되어 있다. 『문종실록』에 최흥효가 예문관 직제학을
마지막으로 70세에 관직을 그만두었고, 1452년 80이 넘은 나이에 문종에게 가요(歌
謠)를 바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의 벼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흥효는 1411년(태종 11) 신묘년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하였다. 이후 승문원에 배
속되어 국가의 대외문서와 각종 필사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明에 보내는 대외문
서의 경우 문서의 형식은 물론이고 문장과 용어 선택에 매우 신중함이 요구되었는
데, 실록을 포함한 여러 문헌에 따르면 문서작성의 실수로 인해 두 차례 파직과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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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을 당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1414년 승문원 부교리로 있을 때 명(明)에 보내는 자
문(咨文)을 작성하면서 “환병(患病)”이라는 문구를 “연로하여 걸을 수 없다(年老不
能動履)”로 고치라는 영의정 하윤의 명을 어기고 그대로 보냈다가 문제가 되어 파
직을 당하였다. 이후 관직에 복귀하여 1420년(세종 2) 인녕부판관(仁寧府判官)을 지냈
으나 상주문(上奏文)에 날짜를 넣지 않은 것이 또 문제가 되어 익산에 귀양을 갔으나
그해 말 복직되었다. 이후 1421년 사간원 우헌납, 1423년 병조 정랑을 거쳐 예문관
직제학을 끝으로 70세에 치사(致仕)하였다. 필명(筆名)과 능력을 인정받아 요직을 두
루 역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40여 년 당하관의 품계에서 관직 생활을 마감하게 된
것은 이러한 실수가 결정적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최흥효는 관직에 있을 당시 대외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주로 담당하는 한편, 필사
와 관련된 국가의 업무도 병행하였다. 이조 낭청으로 있을 때에는 국왕의 관리 임명
문서인 고신(告身)을 필사하기도 하였으며, 왕실 발원 불사의 사경(寫經) 작업에도 여
러 차례 참여하였다. 태종비 원경왕후의 발원을 이루어주고 명복을 빌기 위한 불경
(법화경)을 베껴 쓰는 작업에 참여하였고, 태종이 훙서(薨逝)한 후 태종의 명복을 빌
기 위한 사경 의식에도 당시 병조정랑으로 참여하였다. 이밖에 세조 때에도 최흥효
를 시켜 「능엄경」을 쓰게 한 뒤 목판본으로 개간하여 인본을 여러 사찰에 두루 나
눠주었다는 설이 있다.
최흥효가 생전에 주위의 글씨 요구에 일일이 응대하여 관청과 민가에 그의 필적이
많았다고 하였는데, 사후에도 그의 글씨는 왕실에서 수집하는 주요 필적 대상이 되
어 고려말의 명필 이암(李嵒)한수(韓修)와 15세기 초 행서와 해서에 두각을 나타냈던
신장성개 등의 필적과 함께 왕명에 의해 공식적으로 수집되곤 하였다. 이렇게 모여
진 명필들의 필적은 내조(來朝)한 외국 사신들의 서화 요구의 대비가 되기도 하였는
데, 16세기 초에는 최흥효의 필적이 안평대군과 박경(朴耕)의 필적과 함께 명의 사신
(使臣)에게 증여되었다.
최흥효는 초서로 일가를 이뤄 조선 초에 안평대군 이용(李瑢)과 더불어 각각 초서
와 행서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15세기 후반의 문인 조신(曺伸)이 『소문쇄록(謏聞瑣
錄)』에서 여말선초의 명필을 논하면서 “최흥효의 초서와 안평대군의 행서가 세상
에 성행하였지만 지금은 이미 희귀해졌다.”고 아쉬워하며 두 사람을 특별히 언급한
것을 보면, 15세기 전반 초서에 독보적이었던 최흥효가 행서에 뛰어났던 안평대군과
그 필명에서 동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성현(成俔)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최흥효의 글씨체가 거칠고 촌스럽다
는 평가와 함께 안평대군 이용이 최흥효에게 글씨를 청한 뒤 이를 찢어 벽에 발라
버렸다는 일화를 남겼다. 이는 정형화된 송설체(松雪體)에 비해 분방한 경향을 보였
던 최흥효의 글씨를 비판한 것으로, 송설체가 이미 저변에 확대되었던 15세기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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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심미적 기준과 인식에 따른 평가라 할 수 있다. 최흥효의 글씨를 폄하(貶下)한 것
은 당시 왕실과 사대부 사이에 널리 선호되었던 송설체를 역대 서법의 전형인 왕희
지에 등치(等値)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위상을 정당화하려는 주류 서단의 배타적 인식
이 발로(發露)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연암 박지원은 성현(成俔)의 평가와는 사뭇 상반되는 평가를 하였다는 기록
이 있다. 연암은 형암 이덕무(李德懋)의 저술을 도은(桃隱)이 필사하여 만든 책의 서
문에서 “아무리 작은 기예라도 집념을 잊고서 매달려야 이루어지는 법인데 하물며
큰 도에 있어서랴. 최흥효는 온 나라에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여 시권을 쓰다가 한 글자가 왕희지와 똑같이 쓰지자 종일토록 앉아서 들여다
보다가 차마 그것을 버릴 수가 없어 시권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이쯤되면 ‘이해득
실 따위를 마음속에 두지 않는다’고 이를 만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최흥효에 대한 평가를 담은 문헌은 그리 많지 않으나, 그가 세상의 이해득실을 떠
나 서예의 본질에 천착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던 것은 객관적 사실이라 평가할 만한
기록이다.
國朝榜目 王朝實錄 登載 官歷
1411年 太宗11年 式年試 文科及第. 名筆書藝家.
承文院副校理. 吏曹佐郎. 仁寧府判官. 司諫院右獻納. 兵曹正郎.
藝文館直提學. 弘文館提學(從二品). 僉知中樞院事(名譽職正三品).
遺墨出典
崔致雲墓碑(拓本). 具慶堂詩帖三篇(木版 海東名迹). 杜牧詩(紙本 謹墨).
李羣玉詩(石版 觀瀾亭石刻). 草書七言絶句(石版 海東名筆).
草書七言絶句(木版 大同書法)
저서
최흥효의 필적으로는 『근묵(槿墨)』에 초서로 쓴 「두목시 염석유 외(杜牧詩 念昔
遊 外)」가 유일한 진적으로 남아 있다. 편측으로 기울어지는 짜임과 분방한 운필은
조맹부와 동시기에 활동하였던 강리노노(康里巎巎)의 초서풍과 유사하여 당시에 송설
체를 비롯하여 원대의 서풍이 다양하게 수용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와 유사한 서
풍이 동시기의 윤계동(尹季童)에게도 보이며 후대의 이태(李迨), 유몽인(柳夢寅) 등으
로 이어졌다.
이 밖에 해서로 쓴 「최치운묘비(崔致雲墓碑)」(1442년)가 강릉시 대전동에 있으며,
『해동명적(海東名蹟)』·『동국명필(東國名筆)』·『대동서법(大東書法)』 등의 법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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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초서 필적이 모각되어 전한다.
참고문헌
- 「최흥효와 15세기 서단」(유지복,『국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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