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파도/세거지



 찬성공파 약수종중
- 1 -
 
 
약수
藥水
종중
宗中
 
1.
약수
藥水
 
종중
宗中
의 
사적
史的
인 흐름                                        
  울산종중의 입향조는 찬성공파[위 광준]의 18대 
[호:
 
 
대부
大夫
 
 
판결
判決
로 
인조
仁祖
 13년 (1635년)
을해
乙亥
년에 
출생
出生
하였으며,영천 
 
에서 울산 
으로 옮겨 
 하였다.
어려서부터 평소 학문과 
효심
孝心
이 지극하였으며, 일찍 
부모
父母
를 여위고 직접
적으로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없어 
종신
終身
시 까지 가슴에 새겨두면서 아파
했다고 한다.   
만년
晩年
에는  몸소 울산 
 
 중턱에 
을 신축하여 
현판
懸板
에 자신의 
인 
을 
각인
刻印
한 후 매일 
을 읆조리며 
선친
先親
을 
사모
思慕
하면서 
산수
山水
를 
즐겨 노래 하였다고 
울산
蔚山
 
향토
鄕土
에 기록되어 있다.  
울산
蔚山
 지역의 유명인사들과 교류를 하였으며, 학문의 발전에 노력하였으
며,특히 
향토
鄕土
의 발전을 위하여 
만년
晩年
까지 노력하였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남아있다.[
울산
蔚山
지역
地域
 
향토
鄕土
]
숙종
肅宗
25년 (1699년) 64세에 
 하여 울산 성안동 
 소재 산[
 
]
에 
부인
婦人
 
제주
濟州
 
[부:
 
판관
判官
,
 
훈련
訓練
 
증조
曾祖
 
 
외조
外祖
 
경주
慶州
 
와 
 하였다.
그 후 울산시 중산동 최씨 공동묘역으로 [울산시 북구 중산동 이원산] 
이장
移葬
되어 
존치
存置
되고 있다.
19대 
 
 
 
 
 
,
이었으며,
 
대부
大夫
 
한성
漢城
 
에 
 하여졌다.
효종
孝宗
5년 (1654년) 
갑오
甲午
년에 출생하시었다. 오정동에서 
만년
晩年
에 
약수
藥水
- 2 -
로 옮겨 집을 지어 
에 
라 하였으며 버들강아지와 
국화
菊花
를 좋
아 하시어 자연을 
滿
하고,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시국
時局
이 어지러움을 
과묵
寡黙
으로 
항의
抗議
 하였으며, 
과 깊은 교분 관계를 유지 하시었다.
숙종
肅宗
46년(1720년) 
 
정월
正月
 14일에 
 하시었으며 
는 울산시 북구 
중산동 이원산 공동묘역에 
존치
存置
 되어있다.
 
월성
月城
 
이 지은 
에 
를 다하였으며,
우애
友愛
가 
돈독
敦篤
하여 선
비로 행동 할 수 있는 부분을 다 한 후 
 하시었다.
당시
當時
 주변에 
회자
膾炙
된 
사친
事親
을 다 하시었다 하여 이 말을 
하지 못할까 하
는 우려에서 
 밭 둑길에 
를 세워 
하게 하노라 하였다.
기히 
 된 
는 한문으로 작성되어 후손들이 해독이 난해 한 점이 있
어 
김해
金海
 
 
 선생이 한글로 번역한 
를 
의 
便
에 
존치
存置
하였다.
배우자는 
부인
夫人
 
문화
文化
 
,
는 창진,묘지는 당초 농소 월천(달천)에 있
었으나,
이장
移葬
하여 북구 중산동 공동묘역에 
부인으로 
 
씨로 
는 
이었으나,현재 북구 중산동 공동묘역에 
안치
安置
되어 있다.
 
의 
는 
.
.
.
을 두었으며,
과 
의 후손
은 없어 
단절
斷絶
되었다.
최초 약수마을 입향조 
의 후손은 
.
(
 
 
 :학문에 통달하여 
문장
文章
이 높고 
하여 언론이 
존중
尊重
하고 모든 행동
이 
법도
法度
에 어긋남이 없어 
인사
人士
들이 모두 다 
을 
추앙
推仰
하였다고 한
다.[울산 향토사]
약수
藥水
 
종손
宗孫
은 
약수
藥水
마을 
 
(찬성공파 19세)의 
후손
後孫
 
(20
- 3 -
세)->창승(21세)[
]->
(25세)->
(26세)->
(27세)->
(28
세)[대통령 포장 수상:새 농민상 수상]->
(29세)로 이어지고 있다.
약수
藥水
마을에는 120호의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었으나,최근에는 산업화 과
정과 농촌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약수
藥水
마을에 
거주
居住
하는 종원은 
소수
小數
이며,매년 
총회
總會
와 
벌초
伐草
 행사,
시제
時祭
 등에는 100여명이 참석하는 집성촌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특히 
선대
先代
들로부터 물려 받은 
재산
財産
을 종중명의로 재단을 등록하는 등
후손
後孫
들이 잘 관리 하여 온 관계로 종중의 총 재산은 상당한 금액 수준 
으로 동 재산의 운영수익을 기반으로 재학 중인 종원 자녀들에게는 대학
교,석사과정,박사과정 자녀들에게 상당한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우수한 학생에게는 특별 장학금을 지원하여 우수한 인재를 육성하
고 있으며,공군 
소장
小將
1명,
박사
博士
3명(대학교 교수 3명,치과의사 1명)을 배출
하고 있다.[2002년 생존자 기준]  
이러한 지원은 지속되며,특히 우수한 인재 발굴을 위하여 과감한 지원을 
할 것임을 장학금 규칙에 정하고 있어 동 자연부락에서 다른 종중으로부
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최무선 장군 추모사업회에는 흉상 건립자금,
입석
立石
 신축비 등을 영천 
최씨 
종중
宗中
을 위하여 
출연
出捐
한바 있다.
의 흐름
영천
永川
 
 
시조
始祖
 
  
 
의 
 
 
 
과 
 
 
을 
가계
家系
로 하는 
가문
家門
으로 
고려
高麗
에서는 
가세
家勢
는 
융성
隆盛
하였으며, 
조선
朝鮮
에서는 
쇠잔
衰殘
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국가적으로 
주변
周邊
환경과 
조선
朝鮮
 
의 내부적인 
모순
矛盾
으로 인하여 
각 
파벌
派閥
과 
전쟁
戰爭
의 난맥상으로 종전의 학문을 숭상하든 세력들이 핍박을 
- 4 -
받으면서 
초야
草野
로 
낙향
落鄕
 하지 않으면 
생명
生命
을 유지 할 수가 없었던 시기로 
볼 수 있다.
특히 1592년 전 국토를 장기간 
피폐
疲弊
화 되었던 
임진왜란
壬辰倭亂
과 1636년 
재발
再發
된 
병자호란
丙子胡亂
으로 국가의 자립능력은 실질적으로 
소멸
消滅
된 상황이었으며,특
히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한 
서민
庶民
의 
폐해
弊害
는 
형언
形言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농민들의 삶은 
 과 
를 넘나드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임진왜란
壬辰倭亂
 후 내부적으로는 
인조
仁祖
반정
反正
,
이괄
李适
의 
 등으로 
민생
民生
은 
기근
饑饉
으로 
도탄
塗炭
에 빠져 
인육
人肉
까지 먹은 상황으로 몰리는 
초근목피
草根木皮
의 기로에서 특히 
하위신분 계급층의 
원성
怨聲
은 끝이 없었다.(유성룡의 징비록) 
한편 당시 
정국
政局
은 
세도
勢道
 정치가 잔존하여 
왕권
王權
은 상당히 약쇄되었으며,특
히 
권신
權臣
 
[경북 안동이 본관으로 
시류
時流
를 잘 파악한 
공신
功臣
]은 실
패한 지휘관이었으나,유능한 군사 관료로 칭하여 지곤 한다.
인목왕후 폐모론에 반대하여 조정에서 퇴각 된 후 인조반정을 주도하여 
공신
功臣
으로 중요한 직으로 역임하였으나,
과거
科擧
에 급제 한 적은 없었다.
을 설치 운영 하여 
광해군
光海君
의 
난정
亂政
과 
이괄
李适
의 난이 발생시 조선의 
군사력 
향상
向上
에는 기여한 바 있었다.
병자호란
丙子胡亂
 후 
인조
仁祖
의 측근이 된후 권세를 누린 후 
효종
孝宗
시 숙청 당할 위기
에는 청나라에 조선을 고발하는 등 역모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처형됨. 
부패
腐敗
와 
파벌
派閥
 정권의 행포로 정국은 혼란에 매몰되었으며,
민초
民草
들의 삶과 
원성
怨聲
은 
에 달하였다.
 
 
 
께서는 
정묘
丁卯
호란
胡亂
이 발생된 8년 후 
병자호란
丙子胡亂
이 발생
하기 1년 
 
인조
仁祖
 13년(1635년)에 
영천
永川
 
 
에서 
 
 
의 
독자
獨子
로 
부모 한 후 
외숙
外叔
인 
울산
蔚山
병사
兵士
 
를  따라 
울산
蔚山
의 
- 5 -
으로 
이거
移居
하여 기거 하게 되었다.[약 3,000천평의 임야 및 일부 
대지]
숙종
肅宗
 25년 (1699년)에 
 하시었다. 
사후
死後
에 
 
대부
大夫
 
판결
判決
로 
되었으며,
는 울산시 중구 
 
에 있었으나 울산시 북
구 중산동 소재 종중 공동묘역으로 
이장
移葬
되어 
존치
存置
되고 있다.
의 
장자
長子
 
 
 
께서는 
효종
孝宗
 5년(1654)에 
에서 기거 한 
후 
만년
晩年
에 울산시 북구 중산동 
약수
藥水
 마을로 거주지를 정 한후 숙종 46
년(1720)에 
하시었다.
사후
死後
에 
대부
大夫
 
한성
漢城
 
에 
되었으며,
는 
이장
移葬
되어 종중공동 
묘역에 
안치
安置
되어 있다.
당시 
양란
洋亂
으로 인하여 
민심
民心
은 흉흉하였으며,민생의 생활상과 삶에 대한 
고충
苦衷
은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은 역사에서 기록되고 있다.
당시는 
 중심사회에서 왕권에 도전하는 경우는 그 어떠한 세력도 
몰살
沒殺
로 대응하여 왔으며, 특히 
연좌
連坐
로 인하여 특정된 사건과 연계된 주변 
인물들 마저도 
전원
全員
 
극형
極刑
에 처하는 반 인권적인 사회였다.
울산지역의 
는 
영천
永川
의 
선영
先塋
에서 울산지역으로 
이주
移住
하게 된 원인은 
기록상으로 확인 할 수 없으나,당시의 사회상과 권력층에서 발생된  암
울했던 사건과 무관한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으로 
추정
推定
 할 수 있다.
후세
後世
의 
자손
子孫
들은 울산의 
 
로 
을, 
약수
藥水
마을의 
로 
으로 정하여 왔으며,
약수
藥水
 마을을 중심으로 120명에 이르는 
후손
後孫
들이 
생존하여 있으며,최초 입향지 
에는 
후손
後孫
이 생존하지 않고 있다.
약수 마을 
의 
 
 
조상
祖上
을 
후손
後孫
이 기리기 위하여 울산광역시 
북구 중산동 
약수
藥水
마을에는 
을 축조[건평 50여평.대지 500평]하여 
- 6 -
매년 종중의 회의 및 행사 개최,울산지역의 학생들이 참관하는 장소로 
제공하고 있으며,
약수
藥水
을 중심으로 한 
파보
波譜
를 작성하여 보관하고 있다.
추증
追贈
된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상당한 근거에 의한 것으로,그 주된 이유
는 전 국민들을 상대로 각 직급이 부여된 일종의 계급 사회에서 사회 주
주도층으로 분류되는 것은 상당한 신분의 
격상
格上
됨을 전 국민에게 선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상기 
 
에는 
.
란 액자를 벽면에 부착하여 두고 
있으며,그간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현존
現存
하고 있는 
은 1965년에 완공한 것이며,최초의 건물은 현 
 
인근에 존재 하였으나,세월의 무상함과 소규모의 건물로 자연 
소실
消失
되었
다.
의 신축 비용은 현재 화패로 10억원을 초과하는 금액이 소요되었
으며,해당 금액의 조달의 일부는 종중의 부동산을 처분하였으며,나머지는 
종손
宗孫
이 상당한 금액을 부담하였으며, 전 종원들이 부분적으로 분담하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관련 기록을 보면, 
 
에서는 활(
)처럼 쟁반처럼 
 으로 
둘려 있는 것이 
이다.
이 산의 한 줄기가 
으로 수십리 꿈틀거리며 날 듯 달려가서 웅장한 
 
울산
蔚山
을 품고 바다위에 우뚝 멈추었다.
학성의 북쪽 10리쯤에 
약수
藥水
이 있으니 이 마을의 앞에는 넓은 들이 있
으며 뒤에는 큰 산을 지고 있다.
그 봉우리는 둥글고 아름답고 골자기는 깊고 숲이 울창하다. 이곳은 진
정 
이 있는 
군자
君子
가 말을 멈추고 
은거
隱居
 할만한 곳으로 
신령
神靈
스러운 차고 
맑은 물이 솟아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 대개 이로써 
가 대대로 
거주하였다.
- 7 -
최씨의 
선조
先祖
에 벼슬이 
직장
直長
을 지낸 
라는 분이 
영천
永川
의 
로부터 
의 
으로 처음 이사를 하여 살게되었다.
이때부터 
충신
忠臣
과 
효제
孝悌
로서 
가업
家業
을 삼고 살았는데 그의 아들 
 
이 
가훈
家訓
 승계하여 어릴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여 그 몸가짐을 도덕과 
검소
儉素
함을 실천하여 선조들의 훌륭함을 
에 맞도록 허리를 굽혀 빨리 
걸어가면서 후손들을 깨우치게 하는 뜻으로 일생의 책임으로 삼았다.
만년
晩年
에 약수동의 깊고 아름다운 풍경을 사랑하여 집을 짓고 살았으니 이
는 근본을 힘써서 후손들에게 편안함을 물려주기 위함이니 그것은 곧 
주자
朱子
가 
에 
학당
學堂
을 지어 학생을 가르치던 일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뜻으로 주택의 곁에 
서실
書室
을 지어 
라 하였으니 이는 
그 산의 모습이 살아 움직이는 것과 같았기 때문인데 이로 인하여 스스
로의 
로 삼고 성취에 힘썼다.
안으로는 책을 배치하고 뜰에는 
교목
喬木
과 
국화
菊花
를 심었으니 이는 실로 조용
히 즐겁게 지내려는 것으로 자연밖의 풍경을 갖춘 것이다.이로써 당시의 
덕이 있는 분들이 찾아와 함게 즐겁게 
하면서 내가 어찌 먼저 자네
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겠는가 라고 하였으니 이는 즉 이미 같은 고향사람
으로 생각하였고 또 
혼인
婚姻
의 이야기를 할 정도로 새로운 정이 쌓였음으로 
서로 존경하면서 왕래가 멈추지 않았으니 그런 즉 
의 평상시의 
명망
名望
과 
덕망
德望
을 짐작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월이 오래 지나고 
있는 분들의 발길이 끊어지자 건물은 
폐허
廢墟
가 되고 
잡초는 무성하여 당시의 훌륭한 발자취가 매몰되었는데 이에 현명한 후
손들이 개탄하고 일어나 다시 세우기를 도모하여 1964년 가을에 
역사
役事
를 
시작하여 다음해인 1965년 여름에 완공을 하니 
좌우
左右
의 
은 더욱 아름
답고 마을은 더욱 더 빛났다. 이는 실재로 
후손
後孫
들의 
를 생각하는 마음
- 8 -
에서 울어난 것이다. 
의 하늘에 있는 
영령
英靈
이 산수의 사이에 배회
하면서 어찌 오고 가지 않으리.
사람은 그 누구나 
조상
祖上
이 없으리요마는 그 
가업
家業
을 잇는 진실된 마음이 
후손
後孫
의 오늘에 하는 것과 같은 즉 윤리가 
멸망
滅亡
될 것을 근심하리요.
그러니 이는 대개 시작은 쉬우나 끝을 맺는 것은 어려운데 후손이 이미 
시작을 이와 같이 훌륭하게 하였다. 마땅히 끝을 잘 맺는 
를 생각해서 
이곳에 거처하고 이곳에서 공부하여 
선조
先祖
의 
후손
後孫
을 위하여 고향을 버리
고 이 곳에 터를 닦은 기로운 마음을 잊지 말고 나날이 마음을 굳게 하
여 
백세
百歲
토록 이 일이 
함이 없기를 기약하면 거의 이 
정사
亭舍
가 영원히 멸
망됨이 없어서  또한 끝을 잘 맺는 
를 다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사
亭舍
의 왼쪽에는 매봉이 있고 오른쪽에는 피령이 있을 것 같으면 아마도 
만고로 푸르름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이 되고 남쪽에는 
이 있고 
북쪽에는 
이 있어 길이 도도히 흐르면 뒤날 이 정사를 관람하는 사
람은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한편 본 
정사
亭舍
을 신축시의 상량문을 보면,
가사
家事
와 
잡초
雜草
룰 걷어내고 처음 자리를 잡으니 이는 일찍 
조상
祖上
이 
을 뿌
린 덕택이요. 벽을 바르고 지붕을 이어 훌륭한 집이 이룩되니 이는 후손
들이 쌓이고 쌓인 근심으로 인한 것이며 이는 실재 세상의 교육에 도움
이 있을 것이니 진실로 가정의 
대계
大計
를 여는데 욕됨이 없네.
공손히 생각해 보니 
은 
부원군
府院君
의 훌륭한 후손이요,
의 
화려한 
이네.
을 닦고 
를 연마하여 대대로 벼슬이 이어졌고 
을 쌓고 
를 닦아 
규칙
規則
과 본보기로 전해 오고 있다. 
의 엣 마을에는 
의 
가 
- 9 -
남아 있고,
의 
(새로 터를 닦음)는 
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효종
孝宗
의 태평시대에 출생하여 어리 시절부터 
이 삼가 하고 순수하였
으며,9세에 
효경
孝經
을 배우고 이미 
을 아는 근본을 알았고, 15세에 
제자
諸子
백가
百家
를 읽고 일찍이 
명성
名聲
을 얻었다.
처가
妻家
의 
호사
豪奢
스러운 베품을 뿌리치고 
의 말을 따라 청렴하게 살기를 
취하였다.벼슬의 길을 버리고 
의 뜻을 따라 배부르고 편안함을 구하
지 아니 하였다. 고기 집고 나물케어 시렁에 가득하였고 옷과 양식을 형
제와 친지에게 고루 나누었네.
이로서 
효성
孝誠
과 
우애
友愛
는 
하인
下人
에게 까지 감동되었고 
신의
信義
는 고을에 부화되
었네. 중년 후에는 
약수
藥水
의 
수석
水石
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정사
亭舍
를 
짓고 
서책
書冊
으로 
천고
千古
의 미묘한 뜻을 구경하고 뜰에는 교목과 국화를 심어 
일생의 먼 뜻을 붙였다.마음은 깊은 물과 얕은 얼음을 대하듯 하였고,
언어
言語
와 행실은 
법도
法度
에 넘지 않았다.
에 
하여 문득 고을의 
공경
恭敬
의 대상이 되었다. 백년의 고택을 번갈
아 
(땔 나무와 먹을 물)가 서로 
해졌고 
이 오래 보존되어 
사방
四方
에 널리 퍼졌고 아름다운 
행적
行蹟
이 남아 있어 덕 있는 사람들의 발길
이 이어졌네.
이에 떳떳한 정성의 일치로 인하여 마침내 훌륭한 
가 다시 세워졌으
니 
와 
이 각각 그 위치를 바르게 함에 때와 장소가 서로 부함하였고 
신령
神靈
이 협조하여 따르니 사람과 귀신의 의견이 같았고 
로서 손님을 대
접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선조
先祖
의 뜻을 잇고 후손을 넉넉하게 하는 일로서 
주선
周旋
함에 모든 
후손
後孫
들은 묵은 정신이 있었음으로 빠른 시일에 
상량
上樑
을 하
게 되었다.
(대들보를 걸치는 것)하니
- 10 -
 
하니:
 바다 위에 아침 해가 떠올라 
이 붉게 물들고 본체는 
허명
虛名
해서 막힘이 
없으니 아마도 당년에 하는 일이 큰 덕을 내렸음을 알 수 있네.
하니:
춤주는 
은 붉은 구름 가득하고 뜰에는 
국화
菊花
가 한가 하니 누구 알겠
나. 당년에 
처사
處士
가 한가히 숨어 살던 곳임을,
 
西
하니:
 힘차게 흐르는 저 강물 같음이여 공부의 
책무
責務
는 휴식이 없음이라.
성인
聖人
의 
교훈
敎訓
이 귀에 들리는 것 같네,
북 하니:
 높고 높은 
의 
준령
峻嶺
이 힘차게 내려오니 어찌 인간의 굳센 
장부
丈夫
가 활
동하지 아니하고 나라를 평화롭게 하겠나,
하니:
북두성
北斗星
의 밝음은 
을 품어 있고 누가 알겠나. 참된 
군자
君子
는 
은미
隱微
한 것
에 
통달
通達
함을 원래 이 
이치
理致
는 진실로 
망령
亡靈
됨이 없는 것이라.
 하니:
자손
子孫
의 
번영
繁榮
은 
이 없을 것이니 저 
후손
後孫
을 돌아보니 모두 어진 사람이
라 
대대
代代
로 큰 
을 얻으리라.
원하옵건데 
상량
上樑
한 뒤에는 
산천
山川
이 더욱 아름다워지고 
인물
人物
이 더욱 훌륭
하게 하소서.집집마다 
과 
를 전하여 
공맹
孔孟
의 학문이 더욱 발전되고 
을 지키어 
사양
辭讓
을 
숭상
崇尙
하여 
(
와 
주자
朱子
)의 학문이 열리게 하
소서.
외 
가 함께 있으니 어찌 옛것만 
통달
通達
하리오.
는 본 받고 
는 서로 
공경
恭敬
하여 증거가 현실에 나타났으니 앞으로 
- 11 -
의 
유언
遺言
을 항상 생각하고 
의 
본의
本意
를 잊지 말라.
                     [
 
 지음]
조 
 
 및 
 
 
약수
藥水
 
종중
宗中
의 
 
비문
碑文
의 
 내용
울산
蔚山
 
 
통정
通情
대부
大夫
 
 
판결
判決
 
의 
비문
碑文
영남
嶺南
 
울산
蔚山
에는 
영천
永川
가 
대대
大帶
로 살고 있어 
진실
眞實
하고 올바른 선비가 많
이 있는 줄 내가 알고 있었는데 지난해 
[
종손
宗孫
].
.
가 울
산에서 서울까지 
천리
千里
 길에 나를 찾아와 아뢰어 말하기를 
의 
가 
으로 
통덕랑
通德郞
인데 
 
판결
判決
로 
된 
 
 
 
 
묘소가 
울산
蔚山
 
 
에 있으며,
배위
配位
 
부인
婦人
으로 
된 
제주
濟州
는 
 
판관
判官
 
의 따님이며 묘는 
와 합장하였다.
예부터 
묘비
墓碑
가 없으므로 
후손
後孫
들이 
을 세우기로 
(서로 협의하여 꾀
하다)하고 
집사
執事
의 글을 얻어 
선영
先塋
을 아름답게 꾸미기로 합니다 하니 
는 
를 주관하고 
는 
이라 보자기에 싸가지고 온 
행장
行狀
을 
나에게 내어 보이니 
행장
行狀
은 
의 
세손
世孫
 
가 
하였으며 그 글에 
의 
선대
先代
를 말하기를 
증조
曾祖
 
 
은 
봉사
奉事
요, 
 
 
는 
이요, 
 
 
은 
이며,
는 
라 하였고, 
는 
연산군
燕山君
을 이어
와 이하를 
소상
昭詳
하게 갖추어 실려있다.
만일 
병조
兵曹
참판
參判
 
 
과 
예조판서
禮曹判書
 
 
이 
에게 11
와 10
가 된
다면 
使
 
 
은 
판서
判書
의 
라,내가 이에 
을 생각하니 우
리 
조모
祖母
 
부인
夫人
에게 
증조
曾祖
의 13
가 되니 나도 
판서
判書
에게 또한 
- 12 -
이 된다.
은 
외가
外家
를 위하여 멀리 서울까지  올라왔는데 나도 또한 
판서
判書
의 
를 거슬러 올라가서 
(
내외
內外
간의 
호칭
呼稱
)의 
를 미루어 
에게 
미칠 때 까지 나아가지 않으리오.
은 
영천
永川
에서 태어나서 어려서 
부모
父母
를 여의고 
외삼촌
外三寸
 
이 키워 성장
하니 
이 
을 
에 장가들게 하였으며, 
울산
蔚山
에 
거주
居住
하게 된 것
은 
처가
妻家
를 따라 살게 된 
연고
緣故
이다.
은 학문을 좋아하고 
효성
孝誠
이 지극하여 어버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 것
이 
종신
終身
토록 
통한
痛恨
이 되어 그 
거처
居處
에 
이라 이름지어 
을 붙이었다.
만년
晩年
에는 
 중턱에 
정사
精舍
를 지어 
이라 
을 걸고 나날을 
를 
읆으며 
산수
山水
를 즐거이 하니 
고상
高尙
한 취미를 
히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함
이 있었다. 
문자
文字
가 
후세
後世
에 
하지 못한 것이 
애석
哀惜
하나 그러나 
 
을해
乙亥
(1635년 
인조
仁祖
13년)에 태어나 
 
(1699년) 
숙종
肅宗
 25년에 돌아가니 
지금와서 그 
세대
世代
가 아득하게 멀었으나 
후손
後孫
이 
히 이어와서 
(
제례
祭禮
)을 하니 하늘이 
으로 갚은 것을 어찌 그 
이 있어 이르는 것이 
아니리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은 
한성부
漢城府
 
좌윤
左尹
으로 
추증
追贈
되고, 
은 
통덕랑
通德郞
라. 
은 
요,
는 
으로 
를 
제수
除授
하니 
이 낳고 
는 
이 낳았으며,
증손
曾孫
 
현손
玄孫
은 더욱 많아 
기록
記錄
하지 못한다.
내가 한 가문의 
성쇠
盛衰
를 이르기를 그 후손이 
몰락
沒落
하고 
번창
繁昌
하는 것은 
선조
先祖
의 
(좋은 
행실
行實
,아름다운 
행실
行實
,착한 
행실
行實
,즉 
선행
善行
)을 어김없이 행
하는데 같이 힘쓸 것인지 그 밖에 달리 꾀할 바가 아니다. 지금 
의 
- 13 -
이 
하여 다 헤아리지 못하는 이가 
선조
先祖
를 
추모
追慕
하고 
(
정성
精誠
스런 
효성
孝誠
)를 생각하는 것이 이와 같이 
히 
하다 이를 것이다. 
장차 더욱 
(좋은 일이 있을 
징조
徵兆
)를 만나 길이 
번창
繁昌
할 것이니 이것
이 
에 
하는 것이 마땅하노라. 
 몸소 
을 쌓아 
후손
後孫
에게 
로운 것을 물려주니 
천추
千秋
만대
萬代
로 즐겁
고 
평안
平安
하리라.
 [1948년 2월 동래 정인보는 삼가 글을 짓고, 밀양 박맹진은 삼가 글을 
쓰다]
[
 
 
약수
藥水
종중
宗中
 
의 
 내용]
내 일찍 
울산
蔚山
를 
하여 보니 
 
 
 
 
 
은 선비의 
행실이 들어나 있음을 마음으로 
기억
記憶
하였는데, 어느 날 나의 
친우
親友
 
 
이 
씨와 더불어 나를 찾아와 
墓碑銘
묘비명
 하라 
을 하니 
은 
의 7세손이요, 
은 
의 
이라.
그 
行狀
행장
을 살펴보니 
이 9세에 
父親
부친
 
에게 
孝經
효경
을 배우며 말하기
를 이 
대로 실천하면 
히 
증자
曾子
(중국의 
현인
賢人
)가 될 것이요. 실천하
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다 하였으며,
(열다섯이 된 
소년
少年
)이 되어서 
를 모두 읽어 학문이 뛰어나 
(이름을 기리다)이 있었다. 
(
이 없는 
노인
老人
)
 
이 
에게 딸의 
화장품
化粧品
을 
(많이 차리다)하게 선
물하니 
이 좋아하지 아니하고 
사양
辭讓
하였으며,
(
한 다툼질)을 부끄
럽게 여겨 
(
과거
科擧
의 일)에 일삼지 아니하고 일찍 
(
농사
農事
일을 하
고,고기 잡고, 나물을  케다)로 몸을 
평안
平安
하게 하였다.
집안은 비록 가난 하였으나, 어버이 
(마음과 몸)를 편하게 섬겼으며 
- 14 -
동생을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고, 나이가 많아 
부모
父母
을 당하여 
(
중이 있음)에 조금도 
나태
懶怠
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을 <
우인
友人
>이
라 하였다.
만년
晩年
에 
으로부터 
약수
藥水
에 
이거
移居
하니 흙은 기름지고 물이 맑게 솟
아나는 곳에 집을 지어 
라 이름하고 
도서
圖書
(그림과 글씨)와 
(버들나무와 국화)으로 
(살아갈 
방도
方途
)를 삼았다.
은 성품이 
(대쪽같이 높다)하고 
(말이 적다)하여 여러 사람이 
(서로 사귀다)하기 어려웠으나 오직 
 
 
이 
(가깝게 
사귀다)하였으며 
항상
恒常
 
에 
거처
居處
하며 
자손
子孫
에게 
선업
先業
(
선대
先代
의 
기업
基業
)을 
(힘써 지키다)하라 
(잘못이 없도록 미리 
조심
操心
함)하였다.
의 
선대
先代
는 
영천
永川
사람이라. 
연산군
燕山君
 
이 
시조
始祖
가 되고 
고려
高麗
와 
이조
李朝
사이
에 
대대
代代
로 
과거
科擧
에 
급제
及第
하여 
(중요한 
관리
官吏
)이 많았다.
은 
좌상
左相
(
의정
議政
)이요.
는 
현감
縣監
이요. 
은 
 
진사
進士
(
성균관
成均館
 
진사
進士
)
요. 
은 
簿
판사
判事
(
簿
:왕실의 
계보
系譜
를 
하고 
 :
과실
過失
 허물)를 
(
죄상
罪狀
등을 
하여 살핍)하던 
관청
官廳
의 
판사
判事
요 
은 
使
요.
은 
병조
兵曹
참판
參判
이요.
은 
판서
判書
요. 
는 
호조
戶曹
이요. 
는 
의주
義州
판관
判官
이요. 
은 
요. 
은 
 
이니 이 분이 
의 
7
이다.
(
궁궐
宮闕
의 
수선
修繕
을 맡아보던 
관청
官廳
)
봉사
奉事
 
과 
대부
大夫
 
와 
 
과 
직장
職長
에서 
 
판결
判決
로 
추증
追贈
된 
 
 
가 
 
이상
以上
이요, 
숙부인
淑夫人
 
제주
濟州
 
 
판관
判官
 
의 
는 
라, 
은 
효종
孝宗
 
갑오
甲午
(1654년)에 출생하여 
숙종
肅宗
 
(1720년)에 
 하시니 
향수
享壽
가 67
라. 
울산
蔚山
의 
쪽 
 
에 
하였고 
 
정부인
貞夫人
 
 
는 
- 15 -
에 있다.
장남
長男
은 
요.
차남
次男
 
는 
로 
(
추밀원
樞密院
 
동지
同知
로 오름)하여 
삼대
三代
로 
하였다. 
 
은 
이요. 
 
은 
,
,
요. 
 
은  
이요.
 
은 
.
.
이요. 
 
은 
,
이요. 
 
은 
,
이며 
婿
는 
이라.
이하
以下
는 
기록
記錄
 하지 않고 
을 
쓴다. 
우인
友人
이요,
행인
行人
이라 하는 것은 당시의 말이며,뒷날 
사기
史記
의 말이
라.
히 
증자
曾子
와 같이 어버이를 섬겼으며 그 때는 밝음이 
태산
泰山
과 같이 있
었을 것이라.이름이 묻히어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무덤에 
를 세워 밝게 보이노라.
                       1948년 
 2월  일
        월성 
은 삼가 짓고 
밀양
密陽
 
은 삼가 쓰다.
- 16 -
[
 
근접
近接
]
-.
한성부
漢城府
 
좌윤
左尹
:종 2품직으로 토지,호구,농상,학교와 관련된 일을 보았
-.
가선대부
嘉善大夫
:조선시대 종 2품의 
.문관의 품계.고려시대로는 
대부
大夫
에 해당되는 
품계
品階
 통덕랑,통정대부,가선대부 등은 
봉작
封爵
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특정한 벼
슬이 아니며,벼슬의 등급을 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문신
文臣
.
무신
武臣
 모두 2품에 봉작되는 것으로  정헌,사헌,가정,가선대부 등이 
있었다.
조선 초기는 
문무
文武
산계
散階
로 사용되었으나 
후기
後期
는 
종친
宗親
과 
의빈
儀賓
의 관계로 
사용되었다.
이 관계는 
 .
.
.참판.
좌우
左右
.
대사헌
大司憲
 등이 해당되었으며,현재의 
대략적으로 차관급에 속하였다.
종1품(부총리):좌찬성.우찬성.판사 제조.판사
종2품관은 
녹과
鹿科
의 4과에 해당되었음, 
중미
中米
12석.조미37석.
전미
田米
8석.
 
17석.소맥8석.
5필.
정포
正布
14필.
저화
楮貨
8장을 연봉으로 받았다.
대부
大夫
는 문관의3품계로 부인은 
숙부인
淑夫人
의 품계였다.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고위직급으로 볼 수 있다.
대부
大夫
는 직급을 
의미하며,별다른 보직이 없으면 대부분 
공명
空名
인 경우였다. 현 직급으
론 1급 관리관 정도의 직급이었다.
공명
空名
이란 헛된 이름뿐인 첩지라는 의미로 조선후기에 특히 남발되었
다.
남발된 경우를 보면 -.자식이 귀한 자리에 오른 덕에 직첩을 받는 경
우 -.나라에서 연로한 노인을 우대하는 뜻으로 70세 혹은 80세를 넘
- 17 -
긴 노인에게 이름뿐인 직첩을 일괄적으로 내린 경우가 많았다.
공명첩이 아니고 실제 관직을 역임한 경우는 정3품 통정대부 까지 오
르기 위해서는 과거시험에 합격하거나,최소한 생원,진사 시험까지는 합
격해야 오를 수 있었다.
통상적으로 정2품이상의 고위직은 호칭이 
대감
大監
,종2품부터 정3품까지는 
이라는 존칭을 사용하였다.
요즘 나이든 노인들을 통상적으로 영강님으로 칭하는데 조선후기에 노
인들한테 직첩을 남발해서 누구나 나이만 먹으면 영감이되었다.
애초에는 영감님이면 종2품,정3품의 관직을 역임한 사람에게만 사용하
던 칭호였으나,
영조
英祖
 후 노인에 대한 칭호로 일반화되었다.
영조
英祖
는 70이넘도록 살면서 자신의 생일날이 되면 수시로 
노인
老人
들에게 
은혜
恩惠
를 베푸는 의미로 직처첩을 내리곤 하였던 것이다. 
은 
관료
官僚
의 
사후
死後
에 품계 또는 직급을 높이는 일 또는 관직없이 사
망한 사람에게 관직을 내리는 일을 말한다.
조선초기에는 
6품 이상의 관원에 대하여 
.
.
증조
曾祖
 3대에 한하
여 
추증
追贈
 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경국대전
經國大典
에는 
2품 이상의 
종친
宗親
,문.
무관의 
.
.
증조
曾祖
 3대에 한해 추증 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추증
追贈
관련 법을 보면,이조에서 아뢰기를 홍무 27년 6월 일 본조에서 수
편하기를 ‘6품이상으로 3대를 제사지내야 할 사람은 죽은 부.모를 추
증하며, 부는 품계를 대등하게 하고, 조부,증조는 각각 한 등씩 감하되 
비도 모두 같으며 공신은 2등을 더한다’라 하였다.
그러나 공신의 아비는 당초 공을 상줄 때 2등을 뛰어 올리는 것이 옳
으며 그 뒤 아들은 관직에 따라 가봉할 때 또한 2등을 뛰어 올리지는 
말고 각품의 조.부의 
추증
追贈
하는 예에 의하소 하니 그를 따랐다.
[태종실록 권제 11,6장 뒤쪽 - 7장 아쪽 태종 6년 2월 11일]
- 18 -
-.
 : 조선 초.중기 
공사
公私
노비
奴婢
 문서의 관리 및 노비소송을 관장한 
관서로 조선초에는 형조 소속의 도관이 1466년(세조 12년)에 변정원
으로 다음해에 장예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764년(영조 40)에는 
보민사로 개칭하여 
형조
刑曹
에 소속되었으나 1778년(영조51)에 혁파되었
다. 
경국대전
經國大典
에서는 
은 정3품 아문으로 정3품 
판결
判決
1명,정5품 
3명,정6품 
4명의 관원과 서리 32명을 두었는데 
 이하의 
관원은 1
에 
西
으로 
판결
判決
 1
을 
해서 편견으로 처리하지 
않도록 하는 겸 판결사제도가 1470년(성종1)에 시행되었으나, 
에 두명의 
당상
堂上
이 있어 오히려 소송이 지체된다는 지적에 따라서  
1529년(중종15)에 폐지 되었다.
의 업무는 
노비
奴婢
 
소송
訴訟
과 이에 관련된 노비의 
,공사천의 
여부의 판결,노비 문서의 관장 등이었다.
고려
高麗
와 
조선
朝鮮
사회에서 노비 소송이 증가하여 판결사의 집에 
을 금
하기도 하였다. 소송을 판결할 때 3개월 마다 
소사
小事
는 30건,
대사
大事
는 20
건을 처결하도록 하는 등 장예원은 주로 노비 소송의 처결을 담당하였
노비
奴婢
문제는 
형조
刑曹
에서 담당하였는데 
노비
奴婢
가 증가하고 
사송
詞訟
이 많아지
자 세조때 변정원,
으로 독립시켜 그 일을 전담하게 한 것으로 
조선시대 들어 
노비
奴婢
관련 소송이 많아지게 된 사정이 반영된 관사이다.
-.
판결
判決
:조선시대 장예원의 정3품 
당상
堂上
으로 장례원의 장관이며 
노비
奴婢
 송사에 관한 판결의 총책임자. 장예원의 장관으로 
정원
定員
은 1명이
었다.
조선
朝鮮
 까지는 도관에서 
노비
奴婢
과 
노비
奴婢
송사
訟事
를 담당하였으나,1467년
(세조13)에 
노비
奴婢
 관련 
송사
訟事
가 증가하면서 장예원이 전담기관으로 독립
- 19 -
하였으며,그 
으로 
판결
判決
를 두었다.
송사는 
인 
의.
과 함께 의논하여 결정하였으며,판결이 잘못되
었을 경우 연대책임을 졌다.
1516(중종 11) 겸판결사 1명이 증원되었다가 1520년에 폐지 되었으
며,1764년(영조40)에 장예원이 없어지고 
형조
刑曹
에 소속되면서 판결사 직
제는 사라졌다.
            
- 20 -
[
]  {전경,
공동
共同
묘역
墓域
}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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