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파도/세거지
判書公派 慶州吾琴門中과 入鄕內曆
판서공파(判書公派) 파조(派組)는 시조(始祖) 휘(諱) 한(漢)의 9세로 자헌
대부 행 감사 이조판서(資憲大夫 行 監司 吏曹判書) 휘 하영(河泳)이다.
휘 하영(河泳)의 조부(組父)는 통훈대부좌우위보승랑 행 경부판관 경상감
사 안렴사(通訓大夫左右衛保勝郞 行 慶州判官 慶尙監司 按廉使), 증자헌대
부의정부좌참찬(贈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 휘 안인(安仁)이며, 安仁의 아들은
홍도(弘道)와 총제공파(總制公派) 파조인 용화(龍和), 홍범(弘範) 3형제이다.
河泳의 부(父)는 통덕랑(通德郞) 홍범(弘範)이다.
판서공파는 河泳으로부터 대를 내려오면서 언양천곡(彦陽泉谷), 영일건덕
(迎日建德), 하양학지(河陽학旨), 자인곡란(慈仁谷蘭), 경주오금(慶州吾琴),
경주사박(慶州士璞), 자인관상(慈仁官上) 7개 문중으로 나뉘어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경주오금문중은 始祖 漢의 9세 휘 하영(河泳), 10세 긍(兢), 11세 강숙(强
淑), 12세 효제(孝悌), 13세 숙생(淑生), 14세 두빈(斗賓), 15세 수현(守賢),
16세 봉정(鳳禎)으로 내려오고 있다.
문중의 인물로는 시조 13세(파조 4세) 휘 숙생(淑生)으로 자(字)는 진호고
재(眞號蠱齋)이다. 1469년(예종 원년)에 태어났으며, 1492년(성종 23년) 登躋
관지좌찬성(登第官至左贊成), 무인년(戊寅年)에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
동피사화(同披士禍) 삭탈관직(削脫官職) 되었다.
(기묘사화 : 1519년(중종 14년) 11월 남곤·심정·홍경주 등의 재상들에 의
해 조광조·김정·김식 등 사림이 화를 입은 사건. 중종 즉위 이후 정국을 주
도한 훈구파에 대해 신진 사림파들이 정계에 진출해 세력을 늘려가면서 갈
등을 일으켰다. 특히 사림파들은 중종반정의 공신 중 공이 없음에도 공신이
된 자들을 솎아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일부 관철시켰다. 그러자 훈구
파들은 사림파들이 붕당을 지어 왕권을 위협하고 국정을 어지럽힌다고 고
해 중종은 이를 수용해 사림파들을 숙청했다. 이후 훈구파가 다시 정계의
중심이 되었으나 사림의 대세는 막을 수 없었다. : 인터넷 다음 문헌)
1520년(중종 15년) 64세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배(配)는 정부인 평해(平
海) 김씨이다.
그후 선조(先朝) 묘소는 전문산(全門山)에 산재(散在)해 있다. 시조 14세
斗賓 묘소가 경주 강동면 왕신리(旺信里) 제궁산(制宮山)에 소재(所在), 도
선향묘소(都先鄕墓所)가 집결되어 있어 이런 사항을 볼 때 경주오금문중 입
향(入鄕) 14세 斗賓 선조가 경주오금에 입향조(入鄕組)라 추정(推定)해 본
다.
‘오금(吾琴)리’는 낙산(오금1리), 용당(오금2리), 샘골(오금3리), 깐창골(오
금4리)로 형성되어 있으며, ‘오금’은 마을 뒷산의 다섯 골짜기가 마치 거문
고처럼 생겼다고 하여 ‘오금’이라 불렀다고 한다. 혹은 형산강이 휘어져 안
으로 굽어드는 모양이 마치 오금(무릎 안쪽) 같다고 하여 ‘오금’ 또는 ‘오구
미’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또 신라시대 때 5각간(角干)이 동시에 배출
된 곳이라 ‘오각골’ 또는 ‘오박골’이라고 부르던 것이 ‘오금’으로 변했다는 이
야기도 있다. 오금문중은 오금4리에 세거하고 있다.
마을에는 ‘사미정(思美亭)’이 있다. 사미정은 시조의 19세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사미헌(思美軒) 휘(諱) 달장(達章)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세운 정자(亭
子)이다. 달장은 1712년(숙종 38년) 2월 11일 태어나 1787년 3월 17일 세상
을 떠났다. 공은 효성이 지극해 부모님 병환에 단지수혈(斷脂輸血,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시게 함)하여 화복하게 하였으며, 3년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조선 정조 15년(1791년)에 정려(정려) 받아 정려각을 세웠으나 6․25때 소
실되었고, 1956년 그 자리에 정자를 다시 세웠으며, 정자에는 ‘금호정사(琴
湖精舍)’라는 현판도 붙어있다.
참고문헌 : 동국여지승람, 대동운부군옥, 영천최씨 대동보, 경주오금문중
전자족보, 경주신문 등
사미정(思美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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