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파도/세거지



사정공파 법산마을과 입향조 죽헌 최항경 선생
  법산마을은 행정구역상으로 성주군 수륜면 남은1리다. 국도 33호선 고령성주 
군계(郡界) 지역 우측 대가천을 건너 야산 자락에 위치한 전형적인 배산임수(背
山臨水)의 농촌 마을이다. 대가천은 김천시 증산면 단지봉과 성주 합천 郡 경계
에 있는 가야산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흘러 성주호를 만들고 다시 동남으로 
물길을 틀어 금수면 금봉천, 가천면 화죽천을 받아들여 고령 군계를 지나면서 
회천으로 이름이 바뀌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대가천 청정수가 유역 들녘을 비
옥한 농지로 만들어 이 하천을 끼고 전형적인 반촌(班村)마을이 형성되었다. 조
선조 거유 한강 정구(寒岡 鄭逑) 선생을 배출한 청주정씨 집성촌 갓말, 사우당 
종택(四友堂 宗宅)이 있는 의성김씨 집성촌 윤동마을 등이 우리 법산과 함께 대
가천을 끼고 있는데 성주를 대표할 만한 명문 유가(儒家) 집성촌이다.
  법산마을은 조선조 중기 1575년 죽헌 최항경(竹軒 崔恒慶)선생이 복거(卜居)하
신 이래 영천최문 집성촌 형성이 본격화되었다. 파조 司正公(죽헌선생 6대조) 할
아버지를 비롯 직계 선조님들의 묘소가 법산마을 인근 선산에 보존돼 있으니 그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선대부터 성주지역에 거주하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고령현감을 지내신 죽헌선생 고조부(諱 希浩)께서 서울(京師)로 전근하시
어 고양시 원당리에서 4대를 거주하시다 죽헌선조께서 법산마을로 이거(移居)하
신 것이다. 조선조 중기 이후 죽헌선생 후손들이 수많은 관료와 선비들을 배출
하면서 仁義와 孝, 禮를 숭상하는 전형적인 유가(儒家) 집성촌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필자의 젊은 시절까지만 해도 법산마을은 우리 족친들만 백여 戶 거주
하였고, 수 천평 대지의 웅장한 古宅이 즐비하였으며 正初에는 한복차림의 젊은
이들이 웃어른들께 세배를 다녔다. 한여름에도 집집마다 방문하는 손님에게 엿
과 한과, 곶감 등 진귀한 음식을 대접하는 등 범절과 禮를 매우 중시했다. 그러
나 70년대 산업화 물결 이후 자녀교육, 직장 등 사정에 따라 도회지로 대거 이
주하면서 빈집들이 점차 늘어나고 관리되지 못한 한옥이 허물어지고 철거되어 
지금은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주민들도 타성이 일부 이주해 
와서 거주하고 있다. 法山이라는 마을 지명은 뒷산이 법률 령 字 모양으로 생겼
다 해서 법산이라 명명했다는 설, 마을 앞에서 내다보이는 星山(별뫼산)이 호랑이
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 호랑이의 氣를 꺽어야 마을이 번성할 수 있다는 뜻에
서 호외법기(虎畏法機. 호랑이는 범 잡는 틀을 두려워한다)의 법 字를 따서 법산
이라 했다는 속설이 있다.
  영천최문 10세 휘 흥효(諱 興孝)公은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으로 문장과 필법
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었다. 이분의 둘째 아드님이 우리 사정공파의 파조 휘 계
손(諱 繼孫)공이다. 사정공파는 자손이 번성하여 하대에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
되는데, 공의 次子(諱 河) 자손은 사직공파(고령 어곡. 현 대종회장 雄學 宗人 문
중), 三子(諱 渙) 자손은 진사공파(거창 일근)로 분파되었다. 사정공 주손(胄孫)은 
14세에서 참의공파(諱 祥, 밀양, 경주 하동), 법산종중(諱 裕), 미산공파(諱 祉, 담
양), 부위공파(諱 祐, 벽진, 운산)로 갈라지고, 또 법산종중 內에서는 죽헌선조님
의 숙부(諱 濬)님 자손이 참봉공파(성주 창천)로 분파되었다. 현재 법산종중은 17
세 죽헌선조님 손자 네 분 할아버지와 죽헌선조님 次子 린(轔) 할아버지께서 派
祖로 각각 좌윤공파(贈漢城左尹), 월주공파(月州公), 방어사공파(行春川都護府使
兼江原道兵馬防禦使), 참판공파(贈戶曹參判), 매와공파(梅窩公) 등 5개 파로 분파
되어 오늘에 이른다.
  법산마을 입향조 죽헌 최항경(1560∼1638) 선생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리에서 
나셨지만 16세 되시던 해 그의 부친(진사. 諱 淨)께서 성주 선영을 둘러보시다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어 현지에서 삼년상을 치른 후 母夫人과 선친의 친구이신 
한강선생의 권유로 법산에 눌러앉게 되셨다. 죽헌 선조님께서는 20세에 한강 문
하에 입문 수학하여 진사에 올랐으나 일찍이 현실 참여보다는 성리학적 가치의 
실천에 뜻을 두어 관계에 진출하지 않고 평생을 성리학자로서 爲己之學 일념으
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의 두 자제 관봉 은(鸛峯 𨏈. 1583∼1656)과 매와 
린(梅窩 轔. 1597∼1644) 역시 동문수학 성취하여 後에 水下三賢(죽헌선조의 거
처 오암정사가 한강선생의 百梅園 보다 대가천 하류에 있다)으로 널리 알려졌
다. 백매원의 여러 제자 가운데 죽헌의 학행을 높이 평가하고 연치를 존중하여 
한강과 동문들은 일찍부터 그를 ‘水下丈’으로 불렀다.
  한강선생이 예서(禮書)를 저술할 때 특별히 죽헌과 그 자제를 청하여 책을 교
감(矯監)하게 하였고, 한강이 창건을 주도한 川谷書院(성주 벽진. 程子와 朱子, 
김굉필 이언적 등을 배향한 사액서원. 고종 5년 훼철) 洞主(원장)를 여러 해 맡
은 뒤 사퇴코자 하였으나 한강이 적극 만류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죽헌의 학덕과 
인품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늙어서 신하된 의
리를 다하지 못하리다”라면서 두 아들을 명하여 고령 의병소에 나가 싸우게 하
였다. 한강선생이 작고하자 죽헌 삼부자는 몸소 염빈(斂殯)을 보살펴 친상(親喪)
처럼 하였고, 회연서원에 향사하는데 초대 원장으로 천거되었다. 6년 만에 사당
을 짓고 묘비를 세우며 문집을 간행하였으니 한강학단 300여 門人 가운데서 죽
헌의 위치가 어떠했는지 알만하다.
  죽헌선생 삼부자 위패를 모신 오암서원(鰲巖書院)은 33호선 국도변 법산마을
로 들어가는 오암산 자락에 위치한다. 죽헌선생 몰후 사림의 공의로 선생이 후
진을 양성하던 오암정사 자리에 영조 6년, 정조 5년 두 번에 걸쳐 서원을 세우
고 위패를 봉안했지만 나라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다. 현재의 서원은 
서원철폐령 이후 서당으로 존속돼 오다 1985년도에 중수하고 2007년도에 지역 
유림과 宗人들에 의해 서원으로 복원되어 매년 3월 初丁日에 향사한다. 등암 배
상룡(藤庵 裵尙龍)은 죽헌을 제사하는 제문에서 죽헌의 풍모에 대하여 “長子의 
風度를 지니고 군자의 意味를 가졌도다. 한번 의용(儀容)을 접하면 누가 마음으
로 취하지 않으리오”라고 그렸으며, 한강학단에서의 위치에 대하여 “회연서원
을 창건할 때 많은 선비들의 촉망으로 公이 원장이 되어 그 의론을 주장하였네. 
마침내 위판을 봉안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정성과 힘을 다하여서 갖추어 짐이로
다”라 회상했다. 
  죽헌선생 유고(遺稿)는 전란과 화재로 많이 없어지고 겨우 4권 2책으로 간행
되었는데 목판본은 현재 안동 국학진흥원에 보존되어 있다. 국역본은 2016년 성
주문화원에서 「法山遺稿」 3권으로 발간하고 사계(斯界) 학자들을 초빙하여 학
술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묘갈명은 성호 이익(星湖 李瀷), 묘도비명은 대산 이상
정(大山 李象靖)이 지었으며 문집 서문은 후대 응와 이원조(凝窩 李源祚)가 썻다. 
이들 근기(近畿)와 영남의 대표적 석학들의 서술은 죽헌의 학덕을 후세에 알리
는데 결정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끝으로 죽헌선생의 인간 자세를 엿볼 수 있는 
自作詩 「竹軒」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猗猗窓畔竹(의의창반죽) 아름다운 창가의 대나무는
    歲寒不改色(세한불개색) 한겨울 추위에도 푸른 빛 변함없네.
    我思衛武公(아사위무공) 나는 위무공을 사모하노니
    九十詩猶抑(구십시유억) 구십에 抑詩 지어 자신을 경계했네. 끝.
  
오암서원 전경
죽헌선생 遺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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